*1 

이 책은 신키겐샤(新紀元社)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Osprey Men-At-Arms



구스타프 아돌프의 보병

북방의 사자와 30년 전쟁

The Army of Gustavus Adolphus 1 Infantry

리처드 브레진스키 저 / 리처드 후크, 리처드 브레진스키 그림 / 코바야시 준코 역(일문판) / 아약후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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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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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구스타프 아돌프를 보라! 18개월중에 그는 최초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2번째에선 패배, 그리고 3번째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어째서 값싼 명예를 얻으려
1818년 나폴레옹으로부터 구르고에게]

 구스타프 아돌프가 순식간에 명군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것은 지극히 특이한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알렉산더대왕이나 나폴레옹같은 인물들과 비견될정도의 지위에 있던 시기도 있다. 어쨌든 자신의 군대를 고무시켜 위업을 달성하고 생애동안에 사람들로부터 신과같이 숭배를 받았던 영웅들이었다.

 그가 국왕으로써 인심을 장악했던 것은 탁월한 능력에 의한 것임은 말할나위 없지만 그 이상으로 말로 설명하기어려운 신기한 힘을 가진 점도 있었다.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시대의 예언자인 파라켈수스는 1549년 세계에 큰 불행이 불어닥칠거라 예언하였고 그건 북방에서 오는 금색의 사자가 독수리를 타도할때에 끝이난다고 이르고 있다.

 재앙의 시작은 30년전쟁이 발발한 1618년이라고 본다. 이 해에 검은 독수리의 문장을 가진 구교도(카톨릭)의 독일 황제는 신교(프로테스탄스) 독일령을 침공했다. 1630년 신교도들이 맹주로 받들던 구스타프는 동포의 구원에 나섰다. 그가 북부 독일에 상륙하자 뜬구름잡듯 전쟁의 양상이나 세간의 소문이 그럴듯하게 전해졌다. 그는 차근차근남쪽으로 진군하여 독일 중앙부인 브라이텐펠트에서 구교도의 군세를 궤주 시켰다. 1632년 신교 루터파의 발상지인 아우쿠스부르크에 도착한 구스타프는 [북방의 사자]로써 사람들에게 환영 받았다.  어느 누구나 그 다음해에 구스타프가 구교도의 아성인 빈을 공격할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1632년 11월 불행하게도 구스타프(이 때는 아마도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을거라 생각된다)는 뤼첸(Lutzen)전투에서 광폭한 기병대에게 습격을 받아서 전사했다.
 
 계몽시대가 되자 [북방의 사자]<Lion of the north>전설은 거의 신화의 영역에 까지 이르렀고 새로운 영웅전설로써 계승되었다. 구스타프는 군대의 개혁을 단행한 초인적인 천재로써 등장한다. 그것은 군사기술의 개혁『군복, 레더 캐논<Leather Cannon>(포신을 피혁으로 덮은 구리제의 경량포), 스웨디시 페더<Swedish feather>(




2008/11/07 20:01 2008/11/0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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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잡학 태평양전쟁
저자 : 후미우라 시로
출판 : 나츠메社
번역 : 아약후




진주만 전야 ②
 

진주만 공격작전에 맹반대를 했던, 해군 군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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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격은 위험이 큰 [도박]이었다.

● 군령부가 진주만 공격에 맹반대를 한 이유
 해군 군령부는 진주만공격작전에 크게 반대를 했다. 그에 주된 이유를 열거해 보자.


① 일본에서 하와이까지는 너무 멀다
일본에서 하와이까지는 약 6,500km. 이정도의 장거리를 이동하면 미군에게 발견되어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보급 문제도 있다. 군함의 항속거리를 생각하면 최저한 1번은 바다위에서 연료를 보급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 방법을 어떻게 할것인가가 문제였다.

② 호랑이 새끼인 기동부대를 위험에 처하게하는것인가
 정규항모를 6척이나 투입하는 이 작전은 리스크가 지나치게 높다. 만일 미군의 반격을 받으면 전멸할 가능성도 있었다. 사실 1941년 9월에 행해진 도상연습에서는 미국 전함 4척과 항모 2척을 격침시켰지만, 반격으로인해 일본도 항모 2척을 잃었다.

③ 항공기의 공격으로 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을까?
당시의 일본해군은 거함거포주의에 집착하고 있었다. 전함이야말로 최강이며 항공기가 전함 함대를 격침시킬수 있을거라고는 생각치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진주만의 수심은 12m로 얕았으며 보통의 뇌격(雷擊/항공어뢰)을 할수없는 문제도 있었다.

④ 점멸요격전과 반대다
앞에서도 기술한대로 일본해군의 기본작전은 미국함대가 다가오는것을 기다려 파상공격을 서서히 퍼부어 적의 전력을 소모시킨뒤에 함대결전을 한다는 [점멸요격전]에 있었다. 적함대에게 선제공격을 거는 진주만공격은 이러한 작전에 반(反)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적진 깊숙히 있는 하와이를 공격하려면 미국의 초계망을 빠져나가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군의 초계망은 넓어서 도중에 발견될 가능성도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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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 군령부₁(海軍軍令部)
해군이 실행할 작전을 입안, 명령하는 최고기관. 본래엔 연합함대 및 연합함대사령장관을 실질적으로 [지휘]할 권한을 가진다.

정규항모₂(正規航母)
처음부터 항모로써 건조된 군함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 상선(商船)에서 개조된 항모를 경항모, 개장항모등으로 부른다. 하지만 정의 된것은 아니다. 아카기(赤城)나 카가(加賀)는 정규항모라 불려지지만 처음부터 항모로써 설계된 것만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탑재기수 60기 이상의 대형항모를 생각하면 된다.

거함거포주의₃(巨艦巨砲主義)
해전에 있어서 적함보다도 큰 구경의 주포를 실은 거함이 승리한다는 생각. 그것에 끝은 18.1인치(46cm) 3연장포를 3기 탑재하고 배수량 64,000톤의 거함 [야마토(大和)]였다. 2차세계대전이전엔 [해전=군함끼리의 포격전]이었기 때문에, 세계각국의 해군은 이런 사상을 골자로하여 앞다투어 거함을 건조했다. 항공기가 거함을 뛰어넘는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2008/10/25 11:30 2008/10/2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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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ote at 2008/10/25 22:43
요즘 본격 2차세계대전이란 만화가 이글루스에서 인기라서 이쪽도 이런 방면 얘기가 좀 활발해진 편이더군요우.
아약후 
wrote at 2008/10/26 08:11
얼음집이나 게이버쪽 블로그쪽 포탈은 거의 이용해보질 않아서요.
견해차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역시 태터쪽이 비교적 좀더 사상적으로 자유롭고 통제가 덜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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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잡학 태평양전쟁
저자 : 후미우라 시로
출판 : 나츠메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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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전야 ①
 

진주만 공격작전은, 왜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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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멸요격전의 파국을 지적했던, 야마모토이소로쿠 연합함대사령장관


● 점멸요격전은 효과없다

일본해군의 대미국전략은 [점멸요격전과 함대결전]에 의한 단기전략을 기본으로 하고있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연합함대를 이끄는 야마모토이소로쿠(山本五十六) 사령장관이었다. 미국에서 주재한 경험이 있던 야마모토는 미일의 국력차를 몸소 실감했다. 세력으로 상회하는 미국함대에게 점멸요격전을 건다고해도 반대로 일본의 전력을 소모시킬뿐, 또하나 미국이 전쟁의 주도권을 쥐어버리면 함대결전의 기회는 돌아오지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 세계의 상식을 뒤엎은, 획기적인 [진주만공격작전]


점멸요격에 반대했던 야마모토사령장관은 아래와같은 작전을 생각해냈다.

① 개전초에 기동부대 의 항공기로 하와이에 정박하는 미국 주력함대를 선제기습공격. 큰 타격을 준다.

② 이러한 타격으로 미군 및 미국민의 전의를 상실시켜 전선을 교착시킨다.

③ 장기전은 일본에게 있어서 불리. 빠르게 정치교섭에 의해 유리한 타협을 얻어 강화한다.

 이 전략은 [점멸요격전]을 뒤집는 점 이외에도, 또 하나 큰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적함대를 주력 타격하는 수단으로 항공기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진주만 이전에 항모와 함재기는 보조적인 병력으로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해군의 주력은 전함이었고 항모는 보좌]라는게 당시 세계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항공본부장도 경험했던 야마모토사령장관은 빠르게 항공공격의 유효성을 착안했다. 항모 여러척을 묶어서 대공격부대를 편성하면 ㅈ거함대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줄수있다고 야마모토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 결과로 [여러척의 항모를 집중운용하여, 항공기로 전함 부대를 격침한다]라는 전쟁사에 남길 획기적인 작전, 진주만공격이 태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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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함대₁(連合艦隊)
[전쟁시에 복수의 함대를 같은 지휘하에 두는 것] 언어상의 의미. 청일전쟁에 걸쳐 일시편성되었고, 러일전쟁에서는 도고헤이하치로 사령장관이 이끌어 러시아 함대를 격멸했다. 일본해군의 주력실전부대라 생각하면 된다. 덧붙여서 연합함대에 소속되지 않는 군함도 존재한다.

기동부대₂(機動部隊)
항모를 중심으로한 함대. 진주만을 기습한것은, 나구모츄이치(南雲忠一)중장이 지휘한 [나구모 기동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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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의 자랑, 항모 아카기(赤城)

기준배수량   36,500 ton
전장   260.64m
최대폭  31.32m
속도 31.2 Knot
승무원 약 2,000명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 사진은 불펌자료이므로 문제될 시에는 삭제하겠습니다(본사진은 개장후 모습)



일본 기동부대의 기함항모. 원래는 전함 나가토보다도 한층 더 큰 전투순양함으로써 건조를 시작했지만, 워싱턴군축조약에 의해서 중지되었고 건조도중에 함체를 항모로 개조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진열대 형태의 3단갑판이었지만 사용하기가 너무 불편한 탓에 결국은 1장갑판으로 개수되었다. 근대항모로 변모한 아카기는 탑재기수 90기를 자랑하는 기동부대의 주력 항모로써 활약했다.



2008/10/23 13:34 2008/10/2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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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잡학 태평양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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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일본전략

 

경제 봉쇄를 목표로 했던, 미국의 [오렌지(어륀지) 작전]


● 대일본 전략 [오렌지]의 탄생

한편으로 미국의 대일본전략은 어땠을까.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메이지37년), 미국은 대일본전략인 [오렌지]를 책정했다. 미국이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했던건, 이것이 시초였다. 하지만 대일본전략은 아직까진 최우선 사항이 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시기에 대영전략[레드], 대독일전략[블랙], 대멕시코전략[그린]도 책정되어있었고, 일본은 끄트머리정도로 취급받았다.


이러한 상황이 일변한 것은 제1차세계대전으로 일본은 구 독일령의 남양제도를 손에 넣었다. 태평양을 경유하여 중국대륙을 엿보던 미국으로써는 간과할수 없는 사태였다.  그걸로 인해 미국은 종래의 대서양을 중시했던 해군전략을 고쳐서 태평양으로 변형을 했다. 미함대의 주력을 태평양에 접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시켰고, 1923년(다이쇼13년)에는 [육해군 통합작전계획 "오렌지"]를 입안했다. 이것이야말로 대일본전의 구체적인 전략이었다.


● 초기의 대일본전략 계획


 장래의 대일본전에서는 필리핀이 열쇠가 될거라 미국은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필리핀에 있는 미군기지를 일본이 습격. 그에 대응하여 미국 주력함대는 서해안으로부터 출격하여 윤형진으로 단숨에 태평양을 건너서 일본함대와 함대결전을 치르고 이에 승리한다.
 여기까지는 일본의 전략과 비스무리했다. 하지만 미국은 더욱더 구체적인 전략을 생각하고있었다. 함대결전에서 승리한 뒤에, 태평양의 제해권을 쥐고 해상봉쇄를 실시한다. 일본육해군만이 아닌 경제활동으로도 공격을 가해 일본을 경제적으로 말려죽이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해상운송로는 토막토막 잘려버려 산업력은 급속히 저하되었다. 더욱이 공장이나 도시도 폭격을 받아서 일본은 무참하게 패배했던 것이다.


2008/10/23 12:35 2008/10/2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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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미(對米)작전

 

러일전쟁의 승리가 낳은, 함대결전과 점멸요격전(漸滅要擊戰)

미국함대와의 결전에서 승리하면, 미일전쟁에서 이길것이라고 일본은 생각했다.



● 미함대를 격멸하면 전쟁에서 이길수있다?

그럼, 미일양국은 어떠 작전계획을 생각하고 있던 것일까. 우선은 일본측을 보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7년(메이지40년)에 빠르게 미국과의 전쟁을 상정한 [제국국방방침]을 책정.

[미함대와의 함대결전에서 이기고, 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것을 기본방침으로 했다. 동해해전(책에서는 일본해해전)의 승리가 러일전쟁의 승리에 연계됐다고 생각했던 일본은 미일전쟁에서도 같은 형태일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일본은 함대결전이 주력이 되는 [88함대](전함8척, 순양함8척)의 정비를 서둘렀다. 한편으로 미국도 1916년에 해군법을 제정하여 합계 186척의 대함건조계획을 개시. 미일의 함선건조경쟁이 시작했던 것이다.



● 워싱턴 군축조약이 낳은, 점멸요격전


하지만 1921년(다이쇼10년)의 워싱톤 군축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작전변경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군축조약으로 일본의 전함보유량은 영국과 미국의 6할정도로 규정되어 버렸던 것이다. 정면으로 부딪혀도 전력에서 뒤지는 일본에게 승산은 없었다.

거기에서 새로이 고안이 된 것이 [점멸요격전(漸滅要擊戰)]이라는 계획이었다. 내항하는 미국함대에게 잠수함이나 구축함, 순양함으로 파상공격을 펼쳐서 적전력을 소모시키고, 그 다음에 주력함대를 투입하여 함대결전을 건다는 것이었다. 이후에 [점멸요격전]은 일본해군의 기본방침이 되었다.

세계제일의 거함인 전함 야마토도 함대결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구축함이나 잠수함도 적함대에게 어뢰공격을 하는 점멸요격용 전력으로써 설계 또는 배치된 것이다.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항공모함마저도, 같은 취급이었다. 항모는 주전력이 아닌, 어디까지나 함대결전의 이전에 항공공격을 하는 적함대전력을 소모시키는 [지원전력]으로써 생각한 것이다.


2007/02/25 20:18 2007/02/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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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ote at 2007/02/28 19:51
이번에 티스토리로 블로그 계정을 옮겼다.
http://poem23.tistory.com <- 이리로~
wrote at 2007/03/02 22:39
라져~~
wrote at 2007/03/02 20:25
스킨은 바뀔지언정..메인은 변함이 없9나..
wrote at 2007/03/02 22:38
어쩔수있나요 제 취향인걸요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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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으로의길④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진주(進駐)가 불러온
대(對)일본 석유 금수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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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를 끊긴 일본은, 이윽고 미국과의 전쟁을 결의한다

●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배후의 근심]을 끊는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의 [남진]을 하기 위해, 일본은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우선은 1940년에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기세인 독일과 일-독-이 3국동맹을 체결. 그리고 다음해에는 최대의 가상적국인 소련과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하여, [북쪽의 위협]을 제거했다. [남진]의 태세는 정비한 것이었다.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일본

1940년 9월 일본은 우선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주. 이 진주에는 [원장 루트]를 차단한다는 노림수도 있었지만 영국은 즉각 다른 [원장 루트]인 [버마 루트]의 재개를 통고. 더욱이 미국은 철강등의 대일 수출금지를 행하여, 경제봉쇄로 압박했다.

하지만 일본의 남진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해의 7월 프랑스의 비시정부와의 합의를 성립시킨 일본은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주를 감행했다.


●대일석유금수가, 개전의 결정타로

남부 인도차이나의 진주에 대해 미국은 결정적인 경제제재를 실시했다. [일본으로의 석유수출을 전면금지]한 것이다. 유전을 가지지못한 일본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한방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석유수입은 80%를 미국에 의존했던 것이다. 근대국가의 혈액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해군은 2년이내에 석유부족으로해서 행동불능이 되어 중요산업은 1년이내에 생산을 정지할 것이다. 이대로는 일본의 명운은 확실했던 것이다.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여기까지 이르러서, 대미전쟁은 결정적이되었다. 미국과의 전쟁에 계속 반대했던 해군도 [전쟁도 부득이하다]라는 방향 전환을 했던 것이다. [석유]. 이것이 태평양 전쟁의 방아쇠가 된 것이다.



석유가 아킬레스건이었던 일본


일본의 석유 의존도 : 1940년의 수입

미국 : 76.7%   ///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14.5%   ///   기타.



각국의 연간 석유 생산량


단위 : 1만톤(독일은 합성 석유 포함)

          일 본  /  미 국  /  독 일  /  영 국

1941       ---     ---        9.6        13.9

1942       1.8     183.9     11.2       11.2

1943       2.3     199.6     13.2       15.8

1944       1.0     222.5     9.5         21.4

1945       0.1     227.2       ?         16.6



현재와 같이 일본은 국내에 유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었지만, 8할을 ‘가상적국’ 미국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또한 동맹국인 독일도 같은 석유부족문제를 안고 있었다. 합성 석유의 제조를 하고는 있었지만, 그 양은 미미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자체적으로 석유를 조달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수입이 막힌 일본은, 상사를 통해서 인도네시아에서 석유를 매입하려했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에 의해서 얼마밖에 안되는 양밖에 구할 수 없었다.

2006/09/14 22:44 2006/09/14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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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으로의길③

중일전쟁과
제2차세계대전의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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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유럽에서는 불길이 오르고, 일본은 남진을 목표로 하기 시작한다



●중일전쟁의 개시

1937년, 베이징 외곽의 노강교에서 중-일의 군대가 충돌. 노강교사건을 발단으로 일본은 중국과의 전면전쟁에 돌입한다. 일본군은 엄청난 기세로 계속 진격했고, 베이징이나 샹하이, 난징을 점령했다. 하지만 중국에 있어서 권익을 일본에게 위협당한 미-영의 반발은 불가피한것이었다. 1939년, 미국은 미일통상조약의 파기를 통고. 더욱이 영국은 일본군과 우는 중국국민당에게 대량의 물자를 수송하는 지원을 개시했다. 국민당 지도자인 장체스의 이름을 따서, 원조물자수송경로를 [원장 루트]라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1939년 9월에는 유럽에서 큰 사건이 발발했다.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이 폴란드에 침공한 것이다. 이 침략에 대해, 영-불은 독일에게 선전포고를했고 제2차세계대전이 개시되었다. 다음해인 5월, 독일은 프랑스등의 서구 국가에 공격을 개시. 네덜란드, 벨기에등은 항복하여 6월에는 파리까지 함락. 친독일정권인 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프랑스도 항복했다.


●[남진]을 노리는 일본

유럽에서의 전쟁개시와 독일은 빠른 진격은, 일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연전연승의 독일을 목표로하여 [결국 영국도 독일에게 패배한다. 만일 항복하지 않더라도 아시아에 간섭할 여유는 없어질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나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종주국인 프랑스나 네덜란드는 독일에게 항복했고, 정치적공백이 생기고 있었다. 남진하여 일본의 세력권을 확대하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특히 일본은 풍부한 유전를 가진 인도네시아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인도네시아를 획득하면 유전을 가지지 못한 일본의 석유문제는 일거에 해결하는 것이었다.


2006/09/12 19:23 2006/09/1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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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잡학 태평양전쟁
저자 : 후미우라 시로
출판 : 나츠메社
번역 : 아약후



태평양전쟁으로의길②

세계공황과 만주사변.
미영과의 대립이 깊어지다.
----------------------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독일과 협정을 맺었다.


◆세계공황이 일본의 고립화를 깊게하였다

쇼와4년, 세계공황이 일어나고 구미열강은 [블록 경제화]를 진행했다. 영국이나 미국은 제각기 식민지나 세력권을 관세장벽으로 둘러치고 [경제의 국수주의화]를 꾀했던 것이다. 난감한 것은 둘러 쌓을만한 식민지가 적었던 일본이나 독일이었다. 구미의 블록경제는 일본・독일의 고립화를 심화시켰고 식민지를 얻어야한다는 야심을 자극해 버렸던 것이다.


만주국건설이, 미-영의 반발을 불렀다

그리고, 일본은 결국에 일을 저질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발발, 일본은 무력으로 세력을 넓혀, 다음해에는 만주국을 건설했다. 영화 [마지막황제]에서 알려진, 선통제 부의(溥儀)를 원수에 추대하고 사실상의 식민지를 건설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영의 반응은 재빨랐다. 국제연맹에 요청하여 리턴조사단[Lytton Commission]을 파견. [만주에 있어서 일본괴뢰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군의 철수와 신자치정부의 수립]을 권고했다. 일본은 이것을 거부하고 결국에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한다(1933년). 외교교섭의 채널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일본과 독일이 급접근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은, 독일과 접근한다. 1936년에 일・독방공협정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름대로, 이 협정은 대(對) 소련 포위망을 목표로 하는것이었다. 러일전쟁이전부터 일본육군에 있어서 가상적국은 [소련]이었던 것이다. 사실, 1939년에는 만주국국경부근에서 일본육군과 소련군이 충돌. 큰 패배를 만끽하고 있었다[노몬한 사건/Nomonhan incident]. 한편으로 일본해군은 태평양에 있어서 대미국전쟁을 상정하고 전력의 배치와 작전계획의 입안을 진행하고 있었다. 육군은 [대륙에서의 대 소련전]을 지향하였고, 해군은 [태평양에서의 대 미국전]을 지향. 이런 육해군의 대립이 태평양전쟁에서도 큰 영향을 주었다.


■경제블록화가 진행된 세계

-독일・이탈리아・일본 블록

-스털링 블록(파운드)

-판아메리카 블록(달러)

-프랑스 블록(프랑)

-소비에트 블록(루블)


세계공황의 결과, 영・미・불등의 열강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둘러싼 경제블록을 쌓아올렸다. 그 결과로 일・이・독등의 식민지를 가지지못한 나라는 대불황에 허덕였고, 파시즘이 대두하고 있었다.


■일본의 주요물자 해외의존도

니켈 100%  / 고무 100% / 석유 92% / 납 92% / 철강 87% / 아연 74% / 주석 71% / 망간 68% / 귀금속 67% / 알루미늄 55% / 동 43% / 석탄 7%


2006/09/11 10:10 2006/09/1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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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 
wrote at 2006/12/07 22:03
잘 보고 갑니다. 원저를 한번 보고 싶군요..
wrote at 2006/12/10 20:59
888 // 왕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은 교보문고에 아직 수량이 남아있는걸로 알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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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잡학 태평양전쟁
저자 : 후미우라 시로
출판 : 나츠메社
번역 : 아약후




제 1장  개전(開戰) 파죽의 진격


태평양전쟁으로의길①


태평양전쟁은 왜 일어났었던 걸까?

---------------------------

러일전쟁이후, 일본은 염원이었던 중국대륙으로의 진출을 하게됐지만.....




●석유를 필요로 했던 일본

처음 일본은, 왜 태평양전쟁을 시작했던 것일까?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식민지인 만주의 유지」.....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극단적으로 논하면, 태평양전쟁은 「석유」를 둘러싼 다툼이었다. 그러면 왜 전쟁을해서까지 석유를 손에 넣어야만했을까? 우선은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간단히 둘러보자.


*대동아공영권 : 일본을 맹주로하는, 동아시아의 경제・정치・군사블록.


중국대륙의 권익을 둘러싸고, 미영(米英)과 대립

태평양전쟁의 원인을 이야기하려면, 메이지37년(1904년)의 러일전쟁때까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야한다. 러일전쟁에 승리했던 일본은, 만주에 있어서의 권익(權益)을 획득. 이후에 적극적인 중국대륙진출을 진행했는데, 중국에 권익을 가지고있는 영국이나, 중국의 권익을 노리는 미국과의 대립을 불러일으키게 되어버렸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연합국측에 서서 참전. 동아시아 및 남태평양의 독일령을 공격해서 전후에 이것들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 결과 필리핀을 식민지로하는 미국과 태평양에서도 대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일본정부는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들이대어 산둥성(山東省)의 구(旧)독일령의 권익을 양도받았지만, 중국 국민들은 이에 반발하였고 중국과의 대립도 일어났다.


일본의 목을 졸라댔던 워싱턴체제

눈부신 기세로 팽창하는 일본을 억지하기위해서, 영국과 미국은 워싱턴체제(1921년)를 확립했다.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일본의 주력함선의 보유수를 제한하고, 영일동맹도 폐기. 더욱이 9개국조약으로 중국의 「주권존중・영토보전・기회균등・문호개방」을 부르짖으며, 막 일본이 얻었던 산둥성의 구 독일령의 권익을 포기하게 시킨 것이다. 미일의 대립이 표면화된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후의 태평양과 아시아

미서전쟁(미국-스페인전쟁)이후, 미국은 「해양제국」으로의 탈피를 꾀하고있었다. 국내시장이 포화상태가 되어, 새로운 시장을 해외식민지에서 구했던 것이다. 그런 발판으로써, 미서전쟁에서는 필리핀을 탈취. 동시에 하와이나 괌을 병함・영유해서 태평양에 교두보를 쌓았다. 노리는것은 중국시장이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획득한 태평양의 권익은, 미국본토에서 필리핀을 거쳐 중국대륙에 이르는 미국의 「제국주의 루트」를 분단하는 형태가 되었다. 당연히 미국으로써는 좌시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2006/09/09 09:05 2006/09/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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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ote at 2006/09/10 19:24
음...일본에 대한 편견떄문인지는 몰라도 어떤 정당화가 써있을까 하는생각이 먼저드는.-_-;
Dr.Hell 
wrote at 2006/09/11 02:10
왠지 먼나라 이웃나라가 생각나는군요.
그리고 본문에 사각형기호는 의도적으로 넣으신건가요?
어째 폰트상의 문제로 깨진듯한 느낌이드네요. 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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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잡학 태평양전쟁

저자 : 후미우라 시로(文浦 史朗)
출판사 : 나츠메社 / 단행본



..



..



..


번역 스타트 합니다.
2006/09/08 18:03 2006/09/0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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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 
wrote at 2006/09/08 20:01
...설마 출판을!?
wrote at 2006/09/08 20:56
Cn- // 설마 ㄱ-;;, 말 그대로 내 혼자의 자체 번역이지.
Dr.Hell 
wrote at 2006/09/11 02:07
지도를 보고 해석하는 잡다한 학문 입니까?
각 전쟁별 시리즈로 다 있을듯 싶은 책이네요
예전 취미가란 모형잡지에 전쟁중의 이야기가 실린글을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그런 책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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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Gakken社의 전략전술병기사전 유럽근대편의 트라팔가해전부분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저작권이 있는 Gakken社와 Ayayoon's Normal Base외에, 게시물을 무단도용하거나 배포하는 것은 금합니다.

제해권을 건 해상결전

트라팔가 해전

영국군 vs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육지의 대국] 프랑스는, 바다에서도 대국이 되려고 했다. 거기에서 영국은 가장 방해적인 존재였고, 그런 영국에는 해전의 스페셜리스트인 넬슨이 있었다….


원저 Gakken
번역 아야코

번역글 보기(상당히 깁니다)..

2005/10/17 19:08 2005/10/17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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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wrote at 2005/10/23 00:58
해상전이라니
대항해시대온라인붐을 타신겁니까?

덜덜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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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文春文庫社의 日本軍艦戰記 -半藤一利-님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아야코의 허락없이 번역한 것 자체를 다른곳에 무단게재 및 도용은 금지합니다.



-분전하며 전진만이 있을 뿐

우가키 마토메宇垣纏
1890(메이지23)년생. 오카야마(岡山)현 출신. 해병40기, 졸업성적 144명중 9등. 해대 졸업. 그의 일기[전조록(戰藻錄)]은 귀중한 기록. 해군중장.


개전직전부터 야마모토이소로쿠(山本五十六)연합함대사령장관이 전사할때까지, 그의 참모장으로써 작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이사람을 상당히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좋은 보좌역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첫번째로 [철가면]이라는 별명이 붙은 오만불손한 성격이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총수의 근원은 인격이다]가 신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략관은 외골수의 거함거포주의였다. 용전 역투형의 투장으로 전투방식의 거의 전진 또는 전진의 과격함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모토장관 전사시에 자신도 중상을 입고 병상에 있던걸 제외하면, 항상 제1선에 몸을 두고 싸웠다.

전세가 불리해진 후반부에서도 지휘방식은, 마치 죽을 곳을 찾는 듯한 분전이었다. 마리아나해전, 비도해전에서는 전함 야마토에 좌승하여 싸웠고, 오키나와결전에서는 규슈의 최전선기지에 있던 특공작전의 지휘를 했었다. 항공결전이 된 전투양상에 늦지않고 쫓아가는 전술적 탁월함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또한 절망감이 깊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저녁, 중장은 가까스로 죽을 곳을 얻게된다. 많은 특공전사의 혼에 사죄하기 위해, 패전의 책임을 죽음으로써 속죄하기 위해, 중장은 하늘의 저편으로 날아갔다.

特功の花散りしきて春ぞ逝く

그의 전중일기에 남겨진 중장의 시구였다. 하이쿠를 읊는 풍류가의 일면도 있던 것이다.


-문인제독의 비극

오이카와 코시로及川古志郎
1883(메이지16)년생. 이와테(岩手)현 출신. 해병31기졸업, 졸업성적 188명중 76등. 해군대장. 1958(쇼와33)년 沒.


본적은 이와테현이지만, 니이가타(新潟) 코시군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에츠로(越郞)만, 뒤에 코시로로 개명한다. 1938년 4월부터 40년 5월까지, 차이나 방면 함대사령장관으로써 중일전쟁 때의 해군 총지휘를 했다. 그 뒤에 급하게 코노에후미마로(近衛文麿)내각의 해군대신으로 기용되었다. 인간적으로 역량에 넘친 대임을 짊어진 점에서 이사람에게 있어서도 국민에게 있어서도, 큰 불행이었다.

삼국동맹 체결과 미일개전시 최후의 결단과, 두 번에 걸친 해군의 대표로써 대답을 해야만 했을 때, 결국 No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해군군인으로써는, 군정(軍政), 군령(軍令), 함대 등, 어느것에 있어서도, 좋은 군인으로써 엘리트였던 제독은, 결국은 정치적으로는 용장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 이상 해군이 반대하는 것은, 이미 국내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이유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궁극의 이유였던 것일까?

다만, 이 사람의 문인기질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었다. 병학교장의 시절, 관사의 서책은 병학교의 도서관보다도 충실했었다고 한다. 해군대신시절, 자택의 광하나가 완벽한 도서관이 되어 있었다. 군인이라기보다는 학자가 어울렸다.

대전말기인 1944년 8월, 그러한 문인제독에게 군령부총장이라는 대임을 맡기게 된것부터가 해군은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의심해보고 싶다. 학식으로는 전쟁을 할 수 없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패의 본질은 모두 해군인사기용의 실패가 지당한것일지도 모른다.


-"기동부대"의 입안자

오자와 지사부로小沢治三郎
1886(메이지19)년생. 미야기(宮城)현 출신. 해병37기, 졸업성적 179명중 45등. 해군중장. 1966(쇼와41)년 沒.


해군대장진급을 고사하고, 중장인채로 일본해군의 최후의 연합함대사령장관을 역임했다. 七高중퇴 뒤에, 병학교에 입학했다는 별종. 1941년 10월에 해대(海大)교장에서 남방파견 함대장관이 되어, 말레이작전의 성공에 크나큰 공적을 올리고, 더욱이 자바상륙작전에도 강력한 지원병력을 보내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문에 육군의 신망이 두터웠고 해군에서 으뜸가는 명제독의 평가를 높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전략전술에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여 태평양전쟁의 사명을 얻은 "기동부대"의 구상은 이 사람이 세계에서 최초로 제언(提言)한 것이었다. 항공부대를 어떻게 조직하고, 어떻게 사용하며, 어떻게 싸울까를 종합적으로 유연하게 생각한 지휘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군인사의 연공서열 때문에, 전쟁말기의 뒤치다꺼리를 맡아서 패한 불운한 사람이었다. 그의 구상이된 기동부대를 시작으로 하여 지휘한 것은, 1944년이 되어서부터였던 것이다.

동년 6월 마리아나해전에서는, 제1기동함대장관으로써 훈련이 불충분한 항모부대를 가지고, 병력이 2배인 강력한 고속항모부대와 싸워야만 했다. 이 때문에 적군 비행기의 항속거리 밖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가한다는 아웃레인지(Out Range)전법의 묘계를 고안했지만, 어찌할 도리없이, 신예의 기함인 타이호(大鳳)를 시작으로 쇼카쿠(翔鶴)를 파괴당하고, 마리아나지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전후에는 [죽어버린 남자다]라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전혀 말을 하지 않는 패장으로 시종일관했다.
2005/06/22 09:25 2005/06/2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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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ote at 2005/06/22 14:40
태평양전쟁의 장본인들인가..
한무제 
wrote at 2005/06/26 08:23
어디서 본 글인데..진짜 전범들은 주동한 청년장교파라고?수뇌부들은 확전을 말리다가 어쩔 수 없이 이끌려 갔다는 쪽이라는데요. 과연 그러했는지? 또 그런 놈들의 색출 처리가 이루어졌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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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겟츄의 게재물을 번역한 것입니다.
퍼가실라믄 출처는 적어주시고 퍼가시길~

번역 : 아야코



파스텔챠임Continue번역정보보기(클릭)..

2005/06/12 00:31 2005/06/12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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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M 
wrote at 2005/06/12 08:02
전투가 밤이 온다 시스템 계승이라 관심이 가긴 하더군요
...그렇지만 그림은 옛날 파스챠가 더 좋아요 OTL
Mr.M 
wrote at 2005/06/12 08:02
역시 아리스는 던젼(미로) 탐험 RPG가 재밌어유우우
Ciel 
wrote at 2005/06/17 20:45
오오. 간만에 보는 번역물이군요-
음. 어째 영원의 아세리아가 떠오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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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文春文庫社의 日本軍艦戰記 -半藤一利-님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물은 2차 저작물이기 때문에, 아야코의 허락없이 무단게재 및 도용은 금지합니다.




-가미가제 특공의 선두

아리마 마사후미有馬正文
1895년 출생. 가고시마현 출신. 졸업성적은 95명중 33번째. 해대졸. 수뢰분야에서 항공분야로. 전사후 중장.


1943년 10월, 남태평양해전에 있어 항모 쇼가쿠의 함장으로써 분전했던 투장이다. 일본군의 공격이 효과를 거두고, 적기동부대가 퇴각하려할 때, 기동부대의 사령부(나구모츄이치 지휘)는 이걸로 전과는 충분하다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자신의 좌승한 쇼카쿠가 중파당하면서도 이 사람은 완강히 [철저히 추격해야한다]라는 의견으로 정황을 상세히 말했지만, 사령관은 간단히 공격을 중지시켜버린다.
뒤에 전투보고를 들은 야마모토이소로쿠 연합함대사령장관은 물었다. [조금 더 추격할 순 없던겐가?] 라고. 과묵한 용장은[그것이 고작이었습니다]라며 대답해버렸다. 야마모토 장관 전사뒤에 이 일을 후회한 이 사람은, 이 뒤에는 확실히 자기 의견을 말하게 되었다.
[전황이 이처럼 악화된 것은, 어디까지나 추격을 해서 적을 꺾는다는 기백이 일본군에게서는 부족해서다. 젊은이들은 앞에 내세우고, 어른이 뒤에서 지시해가는 것은, 이긴 싸움일때는 좋지만, 지금은 그러한 것으로는 안된다. 나는 예비학생의 제도로 하여 파릇한 청년들을 많이 전장으로 보냈다. 이제부터는 어른이 먼저 죽는게 순서다]
1944년 10월, 제26항공전대 사령관으로써 필리핀에 있던 그는, 적기동부대의 내습을 맞아서, 도금된 소장(小將)의 금장을 쥐어들며, 육상공격기에 뛰어들었다. 그의 말대로 스스로 진두에서서 필사필중의 특별공격에 출격하였고, 귀환하지 않았다. 가미가제 특공의 선두라고 해도 좋다.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고

이토 세이이치伊藤 整一
1890년 출생. 시즈오카현 출신. 해병 39기. 졸업성적 148명중 15번째. 해대(우등)졸. 전사후 대장으로 진급.

1941년 9월에 군령부차장으로 착임. 44년 12월까지 전쟁의 태반을 해군중앙에서 있었고, 전쟁지도를 해왔다. 그뿐아니라 전략전술적인 면이 너무나 서툴러서 많은 장병을 죽게한 일로 강한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1945년 1월, 제2함대 사령장관에 착임. 뒤늦게나마 제1선에 섰다.
그러나 잔존주력은 십수척, 게다가 기름도 바닥나고 있었다.
그런 중장 지휘의 함대에 명령이 떨어진 것은,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직후인 4월. 두뇌가 명석하고 합리주의적이라고 칭송받던 중장은, 하늘에서의 원군이 없는 알몸 함대의 출격이 작전이라고 할수 없는 무모한 계획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억인의 총특공의 선두가 되었음 싶다]라는 토요다소우부 연합함대사령장관의 한마디로, 말이 없이 명령을 수행했다.
4월 7일에 출격을 한 이토"자살"함대는 "예정대로" 미공군의 맹공격 앞에서 규슈 坊ノ岬 앞바다에서 괴멸했다. 중장은 야마토의 함교에서, 막료가 [작전을 중지할 수는 없습니다. 구축함이 아직 건재합니다. 옮겨타서 오키나와에 돌입해야합니다........]라는 반대론을 누르고, [작전중지, 잔존함정은 내지로 귀환하라]라며 강하게 명령, 그리고 장관실로 들어가 자물쇠로 잠궜다.
최후의 최후가 되어서, 자신의 무능한 작전지휘력에 대해서 속죄를 하게 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상부에서의 명령에 반대하는 것과 같은
의사결정에 의하여, 많은 부하를 살리고, 자신은 살려고 하지 않았다.




-차가운 눈과 두뇌

이노우에 시게요시 井上 成美
1889년 출생. 미야기현 출신. 해병 37기. 졸업성적 179명중 2번째. 해대졸. 전후에는 침묵으로 종시. 1975년 사망.


냉정하고 넓은 시야로 전쟁의 결말을 꿰뚫어본 얼마되지 않는 군인중 한명이다. 개전전에, 일본, 이탈리아, 독일이 삼국동맹을 맺는 것에 요나이 미츠마사(米內光政) 海相, 야마모토이소로쿠차관과 함께 군무국장으로써 맹반대를 했던 것도, 개전 직전에 항공본부장으로써 개전의 어리석음을 잘 설명한 것도, 이 사람의 탁월한 세계관에 의한 것이다.
1941년 1월, 오이가와코시로해상에게 제출한, [신군비계획론]은, 이지적인 분석력, 객관적인 판단력, 규격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에 기초한 전략관의 결정체였다. 해상결전주의등은 케케묵고 미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통론했고 [전함은 불필요. 남태평양의 섬들을 기지로써, 항공기를 해군의 주력으로써 해야한다]라고 주장했지만, 해군전략의 전통인 거함거포주의의 흐름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에 중앙에서 쫓겨나 제1선에 서서 제4함대 사령장관으로써, 산호해 해전의 총지휘를 했지만, 그의 싸움방식은 용맹심과 결단력이 빠졌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아서, 병학교(兵學校) 교장으로 좌천되었다. 전쟁말기에 요나이(米內)해상을 도와서 차관으로써 중앙에 복귀, 종전 공작에 노력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지나치게 냉정하고 합리적인 사고는 하는일마다 육군과 충돌하여 [요나이와 이노우에에겐 해군만 있고 나라는 없다]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야했다. 1945년 5월, 대장으로 진급과 함께 요나이해상은 결국 이사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그 두뇌와 차가운눈을 개전전에 활용해야했지만, 그것을 뒤로하여 패배했다.


-원저 : 한토 카즈토시
-번역 : 아야코
2004/11/30 18:50 2004/11/3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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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wrote at 2004/11/30 20:05
허어....울 나라에 저거의 반쪼가리나 따라갈 인간들이 몇이나 될까요.(적국이지만, 결행력만큼은 독립 열사님의 투혼(?)에 뒤지지 않군요.-_-)
wrote at 2004/12/06 11:34
한 미국자료에 실린 간략 설명문에서 발췌.
별다른 내용은 없지만 보조문 정도로 해둘까요.

Arima//전쟁 말기에 제 26항공전대를 지휘. 적의 기동타격대에 의해 휘하 부대가 큰 타격을 입자 스스로 전투기에 탑승하여 적군을 향해 돌격, 산화하였다.

Ito//오키나와 해전에서 전함 야마토에 탑승하여 제 2함대를 지휘. 이 자살이나 다름없는 작전이 실패로 끝날 것이며, 전세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음을 익히 알면서도 출진, 전사하였다.

Inoue//미국과의 전쟁에 대해 크게 반대하고, Axis 삼국동맹에 대해 이의를 제기, 개전 이전까지는 반전파에 속했으나 개전 이후로는 항공병력의 증가에 힘쓰는 등 강병을 꾀함. 산호해 해전에서 짓쳐들어오는 적 기동함대로부터 퇴각을 결행, 그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wrote at 2004/12/06 22:12
고묵님은 그 자료를 어디서 얻으셨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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